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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식 개인전 <선상에 서다>: 지구는 다른 사람이 지켜줘

  어느덧 5번째 개인전이다. 첫 개인전 <지구를 지켜라>(갤러리 보다)를 1999년 열었으니, 대략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결산하는 셈이다. 서른 중반의 나이를 감안하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기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요즘에야 수많은 공모전을 통해서 개인전을 할만한 기회가 많은 탓에, 서른 이전에 개인전을 3회 넘게 하는 작가들 보기도 어렵지 않지만, 10년전만 해도 상황은 지금과 판이했다. 스물은 고사하고 서른이 되어도, 자비로 개인전을 하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했던 이상한 시절이었다. 그러던 차에 1세대 대안공간이 생겨났다. 초기에 수도 적었고 힘도 달렸지만, 전과 다른 물길을 터놓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미술계를 쥐락펴락했던 학교・화랑・국전의 전근대적 삼위일체의 망령에서 벗어날 진지를 구축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당연히 양질의 신선한 작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때 등장했던 ‘앙팡 테러블'은 앞 세대와 깊게 단절했다. 이때 단절한 만큼의 양식적 특성이 있었는지, 당연히 논쟁이 뒤따라야 하겠다. 다만, 대안의 공간과 신진의 작가가 호흡하며, 미술계의 새로운 ‘엔진’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박용식 또한 그런 흐름을 탔던 작가로서, 1세대 대안공간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지만, 언저리를 오고 가며 꾸준히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십년이 지났다. 박용식은 현재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보고 있을까.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끊었던 작가들과 비교하면, 그는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도 같다. 작품이 확실히 인정받은 것도 아니고, 가격이 높게 형성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관심을 못 받거나 덜 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개인전도 기획전도 꾸준히 진행하며, 왕성히 작품을 내놓고 있다. 한마디로 잘 나가는 것도, 안 나가는 것도 아니란 얘기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다분히 상대적인 가늠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가 보기에 그는 운이 나쁜 경우지만, 반대로 나름의 자리를 잡은 경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평가’는 일러도 한참 이른 것이다. 어느 누가 예술작품에 순위를 매길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작가가 현재 느끼는 무엇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뼈대 연작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내가 뼈대라니, 그의 이력을 생각했을 때 조금 의아했다.

 

  지금까지 박용식은 강박적으로 새것에 집착하는 세태와 다른 길을 걸었다. 오히려 그는 고집스레 애초의 모티브를 아끼고 다듬어 나갔다. 초기에 (대중)매체의 내용에 기울었던 관심은, 매체의 형식으로 조금씩 옮겨지며, 결국 형식이 사진과 설치로 분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소극적(笑劇的) 주체와 작은 세계를 견고히 구축했다. 그것이 <YS Entertainment Company>다. 그렇게 보면, 여전히 ‘지구를 지키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매체의 내용과 형식을 오고가며 꾸준히 ‘바깥’을 쫓았던 셈이다. 변화의 조짐은 2006년 신치현과 함께 했던 2인전 <상상혼합>(한전 갤러리)에서 나타났다. 나뭇가지를 마치 뼈처럼 인공관절로 이어붙인 나무작업이 처음으로 선보였다. <선상에 서다>는 이것을 좀더 확장했다. (전시는 구색 잡는 식으로 예전 작품이 뒤섞여 있는 바람에, 많이 아쉬웠다.) 자신만의 상징인 개와 쥐의 뼈대를 비교적 크게 세웠으며, 좀더 작은 크기로 팔의 뼈대를 만들었다. 새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편차는 있었다. 작은 크기의 팔의 뼈대 연작은 정밀한 형태를 보였지만, 개와 쥐의 뼈대는 어쩐지 미완의 인상이 짙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질료의 문제로 보인다. 첫째 나무뼈대의 속성상 큰 것보다 작은 것이 알맞다는 것. 아직 시험단계이므로, 좀더 두고볼 문제기는 하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다. 개와 쥐는 예전 작업의 연장이지만, 팔뼈는 전에 없던 내용이라는 것.

 

  앞서 지적한 속내가 뼈대라는 얘기는, 은유가 아니다. 이곳에 ‘엔터테인먼트 패밀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뼈대로 구성된 내부를 응시한다. 그것이 자신의 쓸쓸한 속내일지 인간의 공허한 내면일지, 더 큰 무엇의 내부일지, 아직은 불확실하다. 하지만, 최소한 지구를 지킬 생각이 없어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아트인컬쳐> 12월호/김상우(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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